'더킹: 헨리 5세'는 어떤 영화일까?
'더킹: 헨리 5세'는 대한민국 기준 2019년 10월 23일 개봉되었고, 같은 해 11월 1일 넷플릭스에 공개된 중세 영국 역사 영화입니다. 데이비드 미쇼 감독이 연출을 맡았으며, 티모시 샬라메, 조엘 에저튼, 로버트 패틴슨 등이 출연하였습니다. 이 영화는 14세기에서 15세기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진 백년전쟁 중 '아쟁쿠르 전투(1415년)'를 소재로 하여 제작되었으며, 해당 전투를 이끌었던 잉글랜드의 왕 '헨리 5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써 내려갔습니다. 지금은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가 된 티모시 샬라메가 잉글랜드의 왕 헨리 5세 역을 맡았으며, 또 다른 할리우드 스타 로버트 패틴슨이 프랑스의 왕세자인 루이 역을 맡았습니다.
잉글랜드 왕 '헨리 5세'
'헨리 5세'는 1387년 9월 16일 출생하여 1422년 8월 31일 사망하였으며, 1413년 3월 21일부터 1422년 8월 31일까지 재위했던 잉글랜드의 왕입니다. 헨리 5세는 처음부터 왕이 될 운명은 아니었습니다. 헨리 5세의 아버지이자 직전 잉글랜드 왕이었던 헨리 4세는 왕족과 혈연지간인 귀족으로, 랭커스터라는 작은 마을의 영주였을 뿐 왕의 적통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왕인 리처드 2세는 어떠한 사건으로 헨리 4세를 귀향 보내는 등 헨리 4세에게 다소 부당한 대우를 반복하였고, 이에 분개한 헨리 4세는 자신의 세력을 모아 리처드 2세를 몰아내고 잉글랜드의 왕이 됩니다. 이렇게 랭커스터 왕가가 시작된 것이죠. 마찬가지로, 헨리 5세는 귀족이었지만 변방의 작은 마을 영주의 맏아들이었고, 아버지인 헨리 4세가 귀향에 가 있었기 때문에 잉글랜드 내에서 별다른 존재감이 없었으나, 이후 아버지가 왕이 되면서 하루아침에 왕자가 된 인물이죠. 또한 자유분방한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주로 평민들과 같이 술, 노래와 같은 유흥을 즐겼고, 그렇기 때문에 백성들의 삶을 누구보다 잘 아는 왕이기도 했습니다. 헨리 4세가 세상을 떠나고, 의회의 만장일치를 통해 잉글랜드의 왕이 된 헨리 5세는 우선 그동안의 쿠데타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잉글랜드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고, 부정적이고 분산된 민심을 전환시키고 결집시키기 위해 프랑스 정복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프랑스로 진군한 헨리 5세는 아쟁쿠르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이후 재차 프랑스에 침입하여 승리를 반복하였습니다. 그 결과,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트루아 조약을 맺게 되는데, 이 조약은 프랑스의 왕 샤를 6세의 딸 캐서린 공주와 헨리 5세가 혼인하고,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날 아들이 영국과 프랑스의 왕이 될 것임을 서약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로써 헨리 5세는 프랑스 정복을 어느 정도 이루게 된 셈입니다. 하지만, 무리한 전투로 건강을 돌보지 않던 헨리 5세는 1422년 프랑스 뱅센 성에서 발진티푸스(감염성 질환)에 걸려 재위 9년도 안된 시점 급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영어를 사용한 왕
지금 생각해 보았을 때, 잉글랜드 왕이 영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인데요. 하지만, 헨리 4세 이전 잉글랜드 왕가에서는 프랑스어를 사용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전 잉글랜드는 프랑스의 신하 국가였기 때문입니다. 때는 911년 7월 20일 프랑스의 왕이었던 샤를 3세는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바이킹족 롤로와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을 맺습니다. 당시 롤로는 프랑스 북부지역을 침략하여 점거하고 있었고, 바이킹 침략에 골치가 아팠던 샤를 3세는 전투만큼은 특출 난 롤로를 회유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샤를 3세는 롤로에게 작위 부여, 점거 중인 지역의 소유권과 통치권 양도, 자신의 딸 기셀라와 결혼, 기독교로 개종, 신하로서 프랑스를 약탈자로부터 보호 등을 제안했고, 롤로는 이를 승인하여 조약이 체결된 것입니다. 그렇게 롤로가 지배하게 된 땅이 프랑스의 노르망디(Normandie)였습니다. 이후 노르망디의 공작이 된 롤로의 후손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1066년 12월 25일 잉글랜드의 왕이 됩니다. 이렇게 잉글랜드에 바이킹이자 노르만 왕조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윌리엄 1세는 엄연히 프랑스의 공작이자 프랑스 왕의 신하였고, 그러한 윌리엄 1세가 영국의 왕이 되었기 때문에 잉글랜드는 프랑의 신하 국가가 된 것입니다. 또한, 이때부터 잉글랜드 왕실은 프랑스어를 사용했고, 프랑스 문화를 따랐습니다. 하지만, 헨리 4세부터는 왕가에서 영어를 사용하였고, 어린 시절부터 백성들과 뒹굴며 자란 헨리 5세는 완벽하게 영어를 구사했습니다. 또한, 헨리 5세는 전쟁에서 기존 프랑스식 기병 전투 방식을 버리고 잉글랜드식 장궁 전투 방식을 채택하였으며, 이러한 것들은 프랑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잉글랜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해석됩니다. 영화 중 불리한 전투를 앞두고 사기가 죽어 있는 병사들에게 외친 헨리 5세의 대사에서도 그러한 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대들이 잉글랜드다. 너희 하나하나가 잉글랜드이고, 잉글랜드가 그대들이다. 너희 사이의 공간도 그렇다. 자신이 아니라 공간을 위해 싸우라. 그 공간을 메워라. 조직이 되고 덩어리가 되게 하라. 뚫을 수 없게 하라. 너희의 것으로 만들라. 잉글랜드로 만들라."
마무리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으로도 유명한 헨리 5세를 중심으로 잉글랜드의 역사를 살짝 들여다보았습니다. 중세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면 넷플릭스 영화 '더 킹: 헨리 5세'를 통해 또 다른 느낌의 헨리 5세를 들여다보는 것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현시점 할리우드 최고 스타 티모시 샬라메 특유의 차분하고 깊은 연기를 감상하는 것도 묘미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감상하는 데 당시 역사적 정보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